[한국경제] "2019 위기를 기회로" 창업 기업인의 꿈과 도전 - 문주현 회장
2019-01-09문주현 "열등감 극복하려는 도전정신이 내 성공의 밑천"…상상력으로 위기 뒤집어 '톱 디벨로퍼' 올랐다
국내 최대 부동산 개발회사 키운 비결 잡초같은 근성 - 시골·검정고시 출신…실력으로 승부 역발상 전략 - 광교·삼송 불확실했던 사업 성공시켜 내 별명은 '독일병정' - 뚜벅뚜벅 앞만 보고 나간다
⑥ 문주현 MDM 회장
2007년 4월 초. 깡마른 체구의 문주현 엠디엠(MDM) 회장이 부산 해운대구청장실 앞에서 서성거렸다. ‘해운대 대우월드마크센텀’ 주상복합의 분양 승인이 지연되면서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가서다. 통상 1~2주일이면 도장이 찍히는 막바지 문턱을 두 달째 넘지 못하고 있었다. 구청은 높은 분양가를 문제 삼았다. 은행에서 빌린 땅값 이자는 그새 20억원까지 불어나 있었다. 종잣돈을 몽땅 털어 개발 사업에 뛰어든 문 회장이 빈털터리가 되느냐, 디벨로퍼로 자리잡느냐를 결정하는 운명의 시기였다.
“구청장이 문 열고 나오기만을 무작정 기다렸다가 말을 건넸는데, 내 소개가 채 끝나기도 전에 돌아가라고 합디다. 문전박대였죠. 그래도 줄기차게 쫓아갔습니다. 내가 뚝심 하나는 타고났어요.”
몇 차례 더 찾아가 읍소한 끝에 겨우 면담 기회를 얻어냈다. 문 회장은 특유의 친화력과 열변으로 센텀시티 부지의 미래 가치가 얼마나 뛰어난지, 왜 고급 주상복합을 지어야 하는지를 쉴 새 없이 토해냈다. 물꼬를 튼 문 회장은 구청장과 실무부서를 오가며 끈질긴 설득에 나섰다. 분양가를 더 깎으라는 구청 요구에 “땅의 가치에 맞지 않는 상품이 들어서면 도시가 망가진다”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개발이익이 탐나서가 아니라 첫발을 내딛는 디벨로퍼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결국 석 달 만에 분양 승인이 떨어졌다. 주변 시세의 두 배가량인 3.3㎡당 1600만원의 조건이었다.
MDM은 뛰어난 입지, 최고급 시설, 최고급 시설, 주방가구 등을 내세워 고급 주택에 목말랐던 부산의 VIP들을 공략했다. 당시 시공사였던 대우건설 현장소장은 “실내를 천연대리석으로 도배하느라 중국의 야산 하나를 다 깎았다”고 했다. 공을 들인 상품에 청약자들은 열광했다. 센텀시티가 고급 주거단지로 인식되면서 타사의 후속 분양도 속속 성공을 거뒀다. 문주현의 이름을 디벨로퍼업계에 각인시킨 순간이었다.
문 회장이 부동산 개발에 눈을 뜬 건 훨씬 오래전이다. ‘조이너스’ ‘꼼빠니아’ 등 여성 의류 브랜드로 유명했던 나산그룹이 부동산 개발에 뛰어든 것이 그에겐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그가 1987년 늦은 나이(31세)에 나산그룹 공채 1기로 입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어느 날 회사 임원이 부르더니 느닷없이 오피스텔 시장을 조사하라고 시켰습니다. 부동산의 ‘부’자도 모를 때였어요. 서울 마포 오피스텔부터 강남역 지하상가까지 발로 뛰며 배웠습니다. 그런데 너무 재밌는 겁니다. 원래 내가 변화를 좋아하는데 프로젝트마다 상품, 입지 여건이 다르니 내 성격과 딱 맞았습니다. 천직을 만난 겁니다.”
나산그룹에서 그는 ‘독일병정’으로 불렸다. 업무 추진력이 강하다고 붙은 별명이다. 그 덕에 일곱 번의 특진을 거듭하며 입사 7년 만인 38세에 ‘별(임원)’을 달았다. 나산의 최연소 임원이었다.
“늦깎이 사회 초년생을 받아준 회사에 대한 고마움이 컸습니다. 하나를 지시하면 셋을 해내겠다는 각오로 주말에도 나와 일했습니다. 직장인이 성공하는 비결이 뭔지 아십니까.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금방 소문납니다.”
잘나가던 문 회장에게 외환위기 파고가 덮쳤다. 많은 기업이 유동성 위기에 직면할 무렵 졸지에 그도 실업자로 전락했다. 몇몇 대기업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지만 그는 고민 끝에 창업을 결심했다.
“모두 기업을 접는 판국에 왜 창업하느냐고 말리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난 항상 위기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겨울에 준비해 봄에 씨를 뿌려야 가을에 걷을 수 있잖아요? 그동안 인정받았으니 자신도 있었고. 세상에 나를 테스트해보자는 오기도 발동했습니다.”
문 회장은 자본금 5000만원을 모아 세 명의 직원과 함께 그해 4월 서울 서초동의 한 칸(33㎡)짜리 원룸에서 MDM을 창업했다. 자신의 성(姓)을 건 이름(MOON Development & Marketing)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디벨로퍼를 꿈꿨다. 하지만 밑천이 없었다. 그가 가진 건 아이디어와 열정, 도전정신뿐이었다. 일단 분양대행업으로 방향을 틀었다.
외환위기는 오히려 기회였다. 미분양 처리에 골머리를 앓던 건설사들이 MDM을 찾기 시작했다. 그는 단순 분양대행에는 관심이 없었다. 상품 기획 단계부터 참여해 자신의 아이디어를 관철시켰다. 분양대행업이지만 건설사를 빌려 사실상 디벨로퍼 역할을 하는 셈이었다. 시장의 욕구를 정확하게 읽는 그가 구상하는 상품은 경쟁력이 높았다.
“상품이 좋으면 마케팅은 끝난 겁니다. 그런 면에서 디벨로퍼는 ‘전략가’라고 생각합니다. 전략에 따라 전쟁에서 승패가 갈리잖아요? 다만 그땐 분양대행사였으니 현대건설, 포스코건설의 갑옷을 입고 싸울 뿐이었습니다.” 문 회장은 상품 기획력을 무기로 수수료도 다른 대행사보다 비싸게 받아냈다. 이때부터 MDM은 4만여 가구를 팔아 치우는 성과를 올렸다. 분양가로 환산하면 16조원에 이르는 엄청난 물량이었다.
호사다마(好事多魔)였을까. 문 회장에게 또 한 번의 위기가 닥친다. 분양대행업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퍼지기 시작했다. 음해성 루머까지 나돌곤 했다. 깊은 무력감에 빠졌다. 그의 말마따나 ‘정나미가 떨어진’ 시기였다. 회사가 흔들릴 기미가 보이자 직원들이 집으로 찾아왔다. 함께 창업에 나선 동료들이었다. “직원들이 불쑥 사과 박스를 들고 들어와서 이제 그만 놓아달라고 하더군요. 어려운 일을 겪으니 사람을 알게 됩디다. 인생에서 가장 쓰라린 상처를 입은 때입니다.”
그 후로 문 회장은 3년간 사업을 접다시피 했다. 상처를 보듬기 위해 그는 걸었다. 탄천을 수도 없이 오갔다. 청계산, 광교산을 닥치는 대로 올랐다. 서서히 마음을 추스르던 문 회장은 비로소 꿈꾸던 개발 사업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직원들이 떠난 빈자리는 더 훌륭한 인재로 채워졌다. 그는 새삼 ‘신의 섭리’를 느꼈다고 했다.
그렇게 결실을 맺은 첫 사업이 ‘해운대 대우월드마크센텀’이다. 이 사업을 합해 그동안 24건의 개발 사업을 수행한 문 회장은 단 한 건의 프로젝트도 실패한 적이 없다. 입버릇처럼 “운이 좋아서”라고 하지만 주변 평가는 다르다. 위기 상황에서 과감하게 베팅하는 역발상의 승부수가 문 회장의 ‘필살기’라고 입을 모은다. 스스로도 “두둑한 배짱은 타고난 것 같다”고 말하곤 한다. 실제 경기 수원 ‘광교 레이크시티’, 고양 ‘삼송 e편한세상 시티’ 등은 사업성이 불확실해 임직원들은 물론 경쟁사도 꺼리던 프로젝트였다.
문 회장의 잡초 같은 근성은 타고난 면도 있지만 길러지기도 했다. 전남 장흥의 갯마을에서 자란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한겨울에 부르튼 손으로 김·미역을 뜯고 뒷산에 올라 땔감을 구해야 했다. 머슴 같은 생활을 도망쳐 들어간 직업훈련원 시절엔 하루 12시간씩 일하다 쇳물이 튀어 온몸에 쇳독이 오르기도 했다. 이러다 평생 공장을 못 벗어나겠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검정고시를 치렀다. 그리고 27세 때 경희대 회계학과에 들어갔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던 그는 이런 고백을 했다.
“난 열등감이 많습니다. 촌놈에 고등학교도 못 나온 놈입니다. 명문대 출신도 아니니 ‘빽’도 없고 내세울 게 없습니다. 오직 실력을 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끄럽기는커녕 소중하고 값진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인지 과거를 숨기는 사람은 잘 만나지 않습니다.”
<원문기사 : http://news.hankyung.com/article/20190109852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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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문주현 회장…이귀남 前 법무부 장관 "사업 수완보다 배려·희생정신 돋보여"
“전 사업 수완이나 도전정신보다 배려와 희생정신을 더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이귀남 전 법무부 장관(사진)은 문주현 엠디엠(MDM) 회장에 관해 묻자 이렇게 답했다. 1951년생인 그는 문 회장의 고향 선배다. 3년 전 문 회장 큰딸 주례를 맡을 정도로 둘 사이는 각별하다. 그는 “성공한 기업인이 많지만 문 회장처럼 사회 환원을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다”며 “각종 후원과 장학 사업을 아끼지 않는 문 회장이야말로 가장 모범적인 기업인”이라고 치켜세웠다.
문 회장은 MDM 창업 3년 만에 처음 10억원이라는 수익이 나자 곧바로 절반을 뚝 떼어 ‘문주장학재단’을 설립했다. 대학 시절 학비가 없어 쩔쩔맬 때 선뜻 장학금을 대준 독지가의 도움을 되새기며 만들었다. 이 재단의 출연기금은 지금 369억원에 이른다. 재단이 지원한 장학생은 2537명, 47억원에 이른다. 이 전 장관은 “문 회장은 네트워크나 비즈니스를 계산하지 않고 도움을 필요로 하면 흔쾌히 지원한다는 점에서 더 가치가 있는 것 같다”고 강조했다.
이 전 장관은 기업인 문 회장의 장점으로 ‘통찰력’을 꼽았다. 그는 “개발 사업에서 단 한 번의 실패를 겪지 않았다는 건 정말 드문 일”이라며 “위기 상황을 뒤집는 상상력과 아이디어에 감탄할 때가 많다”고 말했다.
<원문기사: http://news.hankyung.com/article/20190109852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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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부터 자산운용까지…年매출 1.6兆 종합부동산그룹으로
수직계열화 구축한 MDM 판교·위례 등 24개 사업 모두 성공
‘분양대행부터 개발·신탁·자산운용까지.’ 엠디엠(MDM)은 21년간 수없이 변신을 거듭했다. 자본금 5000만원으로 시작한 MDM은 그새 연 매출 1조6150억원(2018년 추정)에 직원 375명, 계열사 8곳을 거느린 그룹사로 성장했다.
첫 시작은 분양대행이었다. 출발은 쉽지 않았다. 건설사들은 변변한 실적도 없는 MDM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문주현 MDM 회장은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코오롱건설(현 코오롱글로벌)을 찾아갔다. 분양뿐 아니라 상품 기획·구성, 마케팅까지 ‘종합 패키지’ 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생소하던 수영장과 피트니스센터 등을 갖춘 ‘호텔식 오피스텔’을 제시했다. 그해 청약은 ‘대박’이 났다. 회사 설립 10년째인 2007년 MDM은 부동산 개발에 뛰어들어 경기 판교·위례, 서울 상암 등에서 24개 개발 사업을 성공시켰다.
MDM은 남들이 눈여겨보지 않은 땅에 주목했다. 대신 그곳에 새로운 아이디어를 심었다. 금융위기 여파가 몰아친 2009년 경기도시공사가 토지리턴제 조건을 내걸고 ‘광교 푸르지오 월드마크’ 부지 매각에 나섰다. 10년째 팔리지 않던 땅을 문 회장이 인수했다.
문 회장은 은행을 찾아가 경기도시공사의 토지리턴제 조건이 달린 매매계약서를 들고 돈을 빌렸다. 부지 매입비 조달에 부담을 느껴 외면했던 경쟁 업체들은 문 회장 아이디어에 땅을 쳤다. 문 회장은 “돈이 없어 사업 못한다는 말은 틀린 말”이라며 “아이디어와 전략이 없을 뿐 돈은 은행에 얼마든지 있다”고 말했다.
2010년부터는 금융업에 눈을 돌렸다. 금융 공기업이던 한국자산신탁을 인수했다. 경쟁 상대로 하나은행이 참여하면서 ‘계란으로 바위 깨기’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MDM은 매입에 성공했다. 서울 역삼동 카이트타워 인수전에선 금융 대기업과 맞붙어 이겼다. 도전정신과 간절함의 결과물이었다.
이후 2012년 여신전문 금융회사인 한국자산캐피탈을 설립하는 등 본격적으로 금융업으로 발을 넓혔다. 부동산 개발·신탁·리츠·캐피털·자산운용을 수직계열화한 국내 최초의 종합부동산금융그룹으로 탄생했다. 문 회장은 “‘구멍은 큰 송곳이 아니라 얇고 뾰족한 송곳이 뚫는다’는 말이 있다”며 “경쟁력과 아이디어는 돈과 규모를 이긴다”고 말했다.
<원문기사: http://news.hankyung.com/article/20190109852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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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주현 회장이 말하는 디벨로퍼란 "디벨로퍼는 도시 공간의 창조자"
지난해 3월 분양한 경기 수원 광교신도시 ‘더샵 레이크시티’ 오피스텔은 입주자들에게 전용 라운지 식당에서 ‘삼시세끼’를 제공하는 서비스를 앞세워 큰 인기를 모았다. 식사를 준비하기 어려운 맞벌이 주부는 물론 바쁜 직장인들의 라이프 스타일에 딱 들어맞는 상품이어서다. 이 같은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린 건 문주현 엠디엠(MDM) 회장이다.
문 회장은 “디벨로퍼는 도시 공간의 창조자”란 소신을 갖고 있다. 상상력을 불어넣어 무(無)에서 유(有)를 창출하는 사람이라는 뜻에서다. ‘주거용 오피스텔’이라는 상품을 만든 이도 문 회장이다. ‘호텔에서는 일하고 자는데 오피스텔에선 왜 안 되느냐’는 발상의 전환에서 비롯된 아이디어였다.
디벨로퍼란 아파트, 상가, 레저시설 등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공간을 공급하는 사람이다. 국내 디벨로퍼 역사는 짧다. 원래 부동산 개발 업무는 건설사가 주도했다. 외환위기 이후 건설사들이 부채비율을 줄이고 리스크를 피하기 위해 땅 매입을 꺼리기 시작했다. 개발과 시공이 분리되는 계기가 됐다. 디벨로퍼들은 상품 기획, 부지 매입, 자금 조달, 시공사 선정, 설계, 마케팅 등의 역할을 진두지휘하다 보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에 비유되곤 한다.
1세대 디벨로퍼로서 문 회장의 책임감은 누구보다 강하다. 한탕주의식 개발이익만 추구하는 업체들은 디벨로퍼 자격이 없다고 일갈한다. “기업은 영속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지속적으로 일자리를 창출해야 진정한 기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디벨로퍼 모임인 한국부동산개발협회 회장도 맡고 있는 문 회장은 특히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다. 그는 “도시 경쟁력은 디벨로퍼에 의해 높아진다”며 “프로젝트 하나하나에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개발 사업을 구상할 때마다 ‘자신을 판다’는 생각으로 임한다. 수요자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게 무엇인지 고민하고 확신이 들지 않으면 상품을 내놓지 않겠다는 것이 신념이다.
그는 서울 한복판에 일본의 롯폰기힐스와 같은 복합단지를 개발하는 방안을 구상하고 있다. 주거와 호텔, 업무, 엔터테인먼트, 쇼핑 등이 하나로 어우러진 꿈의 도시(compact city)를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디벨로퍼 문주현이 반드시 해내야 할 사명이라고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