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 문주현 엠디엠·한국자산신탁 회장
입사 7년 만에 특진 7회…36세 임원
부동산의 ‘부’字도 몰랐지만 발로 뛰어
강남서 '주거용 오피스텔' 장르 개척
대기업 러브콜 마다하고 '내 사업' 길로
사업하는 사람이 술 한잔 못하냐고요?
과로로 폐결핵…딸 생각에 건강 다잡고
'산 밑에 길 있다' 중국 속담 되새겨
접대 없어도 실력·간절함만 있으면 성공 “요즘 주로 생각하는 건 나눔과 상생입니다. 너와 나, 고객과 상품, 사회와 기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지난 3월 한국부동산개발(디벨로퍼)협회장을 맡은 것도 부동산 개발을 통해 넓은 의미의 사회 상생을 만들어 보자는 꿈이 그 배경에 있습니다.”
정동헌 기자 dhchung@hankyung.com
여성 의류브랜드 ‘조이너스’로 유명했던 나산실업은 1990년대 고속 성장 기업의 대명사였다. 1980년대 후반 매출 200억원 수준의 중소기업에서 외환위기 여파로 1998년 초 경영난을 겪기 직전 국내 30대 그룹에 들었다. 일반인들에겐 나산그룹 창업자인 안병균 당시 회장이 회자됐지만 부동산 업계에선 안 전 회장과 호흡을 맞췄던 30대 중반의 임원을 주목했다. 서울 강남 테헤란로에 오피스텔 개발붐을 몰고온 ‘선릉역 샹제리제센타’ 등을 기획하며 입사 6년6개월 만에 ‘별’(이사)을 달았던 문주현 엠디엠·한국자산신탁 회장(56)이 주인공이었다.
국내 부동산업계에서 문 회장을 ‘최고의 디벨로퍼(부동산 개발자)’로 부르는 데 이견을 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 부동산 개발자로 숨 가쁘게 달려온 그는 “요즘 주로 생각하는 건 나눔과 상생”이라고 했다.
영농후계자에서 부동산 개발자로
지난 20일 서울 역삼동 남도음식점 ‘해미정’에서 만난 문 회장은 꼬막무침 명란찜 등 해산물 밑반찬이 나오자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꺼냈다. 전남 장흥군에서 9남매의 다섯째로 태어나 공부하러 떠난 두 형을 대신해 농사와 김·미역양식을 배웠다. 착실한 영농후계자를 꿈꿀 때였다. 하지만 태풍과 해일 등 자연재해를 겪으면서 한계를 절감했다.
“홍수가 한 번 나면 1년간 고생한 게 다 휩쓸려 가요. 속수무책이죠. 자연과 싸울 게 아니라 사람하고 싸워보자고 결심하고 도시로 나왔습니다.”
결국 중학교 친구들보다 세 살 늦게 광주 직업훈련소(현 한국폴리텍대 광주캠퍼스) 기계과에 입학했다. 열심히 공부했지만 온종일 기계만 바라봐야 할 것 같은 미래는 어두워 보였다. 30년 후 모습은 잘 해야 공장장이었다. 대학에 가기 위해 대입검정고시를 쳤다(그는 검정고시중앙회장을 맡고 있다). 부산의 한 공과대학에 합격했지만 기계보다는 사람과 호흡하고 싶어 포기했다. 군대에 다녀온 뒤 27세 늦깎이 대학생이 된 이유다. 회계학과를 택한 건 기업을 분석한다는 학과 소개가 좋아서였다.
1987년 당시 연매출이 200억원 정도이던 중소기업 나산실업에 입사한 뒤 부동산개발과 인연을 맺었다. “전용률·용적률·건폐율 등 부동산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런데 안병균 회장께서 오피스텔 시장조사를 해오라고 하니 어쩌겠어요. 그날로 마포 오피스텔부터 강남역 지하상가까지 발로 뛰었죠.”
‘선릉역 샹제리제센타’를 기획·분양했고 주거용 오피스텔(미씨 860)이라는 새로운 장르도 개척했다. 입사 뒤 매년 특진을 거듭하며 36세에 임원이 됐다. 나산실업도 나산그룹으로 커져 재계 30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안 회장님이 한 개를 주문하면 세 개 정도를 했던 것 같아요. 지금도 안 회장님을 인생의 스승으로 여기고 만남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문 회장은 직원들에게 “자기자신을 직급처럼 회사의 일부분으로 생각하지 마라. 내가 있어서 회사가 있다는 마음을 가져라”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회사에서 자기 위치를 규정지으면 꿈의 한계가 정해지고, 일하는 폭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1997년 말 외환위기가 창업의 길로 이끌어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새로운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부동산 개발업계 실력자로 인정받았던 그는 나산그룹이 힘들어진 뒤 대기업들의 러브콜을 받았다. ‘다시 샐러리맨으로 돌아갈 것인가’하는 고민이 시작됐다.
“좋은 사무실에 아파트와 자동차까지 준다고 하니 처음엔 솔깃했어요. 그런데 마음속 어딘가에서 ‘이제 혼자서 해 봐라. 이제까지는 회사의 울타리에서 커온 것 아니냐’는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그 길로 5000만원을 손에 쥐고 서울 서초동의 33㎡짜리 원룸에서 분양대행업체를 차렸다. 국내 최대 시행업체가 된 엠디엠의 시작이었다. 첫 사업은 경기 분당신도시 분당선 미금역 인근 주거용 오피스텔(코오롱 트리폴리스). 개발 방법을 고민하던 코오롱건설(현 코오롱글로벌)에 과감한 제안을 했다. 수영장 등 피트니스센터를 갖춘 호텔식 오피스텔을 짓자는 것. 문 회장은 프레젠테이션에서 “나는 갑옷도, 무기도 없다. 코오롱이란 갑옷을 입고 한 번 싸워보겠다”고 했다. 당초 2000여실로 구성된 소형 오피스텔을 최고 386㎡ 크기의 고급 주거상품으로 바꿔 ‘대박’을 터뜨렸다. 이후 현대건설 두산건설 현대산업개발 등 대형 건설사들이 분양을 의뢰해왔다. 지금까지 그가 판 집을 분양가격으로 환산하면 14조원(4만여가구)에 달한다.
쫄깃한 민어회와 식감이 부드러운 민어전이 나왔다. 민어회 한 점을 집어든 문 회장은 “분양대행은 종잣돈을 마련하기 위한 발판이었다. 내 꿈은 처음부터 부동산 개발이었다”며 첫 개발사업지인 부산 해운대구 ‘월드마크 센텀’ 이야기를 시작했다.
개발업계 ‘미다스의 손’으로
부산 센텀시티 내 주상복합인 월드마크 센텀은 2007년 당시 부산 평균 분양가가 3.3㎡당 800만원대인 시절 두 배인 1650만원으로 분양가를 책정했다. 양면 개방형 설계와 조망권을 강조한 동배치, 특화된 커뮤니티 시설로 주목받으며 6개월 만에 100% 계약을 마쳤다.
“모델하우스 내 유닛도 한 번 부수고 다시 지을 정도로 신경을 많이 썼죠. 직원들은 ‘3.3㎡당 1350만원 이상 받으면 실패한다’고 말렸지만 상품력을 믿었습니다.” 그 후 ‘판교 푸르지오 월드마크’ ‘송파 푸르지오 시티’ ‘광교 푸르지오 월드마크’ 등 손대는 사업마다 성공하면서 부동산 개발업의 아이콘으로 부상했다.
올해도 좋은 땅을 많이 확보했다. 서울 세곡동 세곡2지구, 위례신도시, 마곡지구 등에서 사업을 준비 중이다. 문 회장은 “올해 전체 사업비가 1조5000억원가량 됩니다. 서울 노른자위 땅이라는 게 공통점이죠. 사람이 몰리는 곳에는 돈이 몰립니다.”
삶의 매 순간이 난관이었지만 그중에서도 큰 고비가 두 차례 있었다. 대학 시절 등록금을 마련하겠다고 일과 학업을 병행한 탓에 폐결핵에 걸려 사경을 헤맸다.
샐러리맨 시절인 1992년에도 과로로 폐가 나빠졌다. 휴직계를 내고 1년간 고향 장흥으로 요양을 갔다. “숨이 차고, 피를 토하는데 부모 형제, 집사람까지는 내가 없어도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큰딸(현정)만큼은 아빠가 없으면 안 될 것 같았어요. 더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큰딸한테는 고마워요. 살게 해줘서….”(웃음)
“간절한 마음으로 매달려 봐야”
구수하면서도 얼큰한 민어탕이 나왔다. 한 숟가락을 뜨던 문 회장에게 성공의 비결을 물었다. “학벌이 좋은 것도 아니고, 부동산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배우지도 못 했어요. 경쟁자보다 부족한 만큼 모든 일에 간절한 마음으로 매달리면서 일해온 게 비결이죠”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2010년 한국자산신탁을 인수할 때는 하나은행과 경쟁했고, 서울 역삼동 카이트타워를 매입할 때는 삼성생명과 붙었다. ‘계란으로 바위 깨기’라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문 회장은 ‘산 밑에 길이 있다’는 중국 속담을 꺼냈다. “성공시켜야 한다는 애절함으로 달려들면 산 밑에 여러 개의 ‘길’이 보인다”고 했다.
엠디엠은 한국자산신탁에 이어 카이트(KAIT)캐피탈도 만들어 종합 부동산·금융회사로 나아가고 있다. 하반기에는 부동산 자산운용사를 만드는 등 금융 부문을 더욱 강화할 계획이다.
성격은 호탕하지만 술은 거의 못한다. 맥주 한 잔만 받아놓고 입에 대지 않았다. 인허가와 업종 특성상 몸으로 부대끼는 일이 잦은 점을 감안하면 약점일 수도 있다. “술이나 접대 없이도 실력만 있으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시곗바늘이 오후 10시를 가리키고 있을 무렵 문 회장은 “건강하게 살다가 죽기 하루 전날까지 일하면 제일 행복할 것 같다”는 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학재단 키우는 사연…“27세 늦깎이 대학생때 받은 은혜 갚아야죠”
문 회장은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고생하던 중 한 독지가의 지원으로 공부를 마칠 수 있었다. 문 회장은 ‘성공해 어려운 학생을 돕겠다’고 약속했다. 2001년 문주장학재단을 설립해 올해까지 1265명에게 15억7000만원의 장학금을 전달했다. 문 회장은 “100억원인 장학재단 출연금을 300억원까지 늘릴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