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경제] 부동산개발사 최초로 신탁회사 인수..
2010-04-01제목 | [건설경제] 부동산개발사 최초로 신탁회사 인수.. | 작성일 | 2010.04.01 | 조회수 | 1357 |
---|---|---|---|---|---|
그는 손에 든 책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검정고시 수기집편찬위원회), 열정의 길에서 희망을 찾은 검정고시인들의 아름다운 도전기를 엮은 책이다. 물론 그 자신이 걸은 길도 담겨 있다. 지인(유영현 부산정관에너지 대표이사)으로부터 문자메시지를 받고 꺼내든 그 책 위로 지나온 시절이 투영됐다. 절망 흐르던 눈물도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허망도 잠시, 공허만 남았다. 태풍이 할퀴고 간 논에는 뽑힌 벼만 나뒹굴고 있었다. 정녕 봄부터 그토록 땀 흘렸던 그 논이란 말인가, 어제만 해도 노랗게 익은 모습으로 기쁨을 주던 그 벼란 말인지…. 지난 겨울, 해일 때문에 김양식장이 망가진 쓰라림이 아직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하늘이 무심하기만 했다. 소년은 두 손을 불끈 쥐었다. 질곡의 삶, 탈출이 그려졌다. -마음의 고통이 심했나 보다. “자연 앞에서 인간은 너무나 나약한 존재였다.” -9남매 중 다섯째(3남)인데, 매우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낸 듯하다. “다시 한번 그때로 돌아가 살라면 절대 못한다고 버티겠다. 어린 생각에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인 일터였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농사에 매달렸다. 집안에 농사를 지을 사람이 없었다. 고향(전남 장흥군 관산읍 어은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반농반어(半農半漁)를 했다. 봄부터 가을까지 논농사, 겨울엔 김양식, 쉴 틈이 없었다.” 추운 겨울, 소년의 벗은 ‘오줌’이었다.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김양식장에서 일할 때, 너무 추워 오줌을 받아 꽁꽁 언 손을 따뜻하게 덥혔다. 초(관산남초등)-중(관상중) 시절 전교 1등을 다퉜던 소년은 절망감에 몸부림쳤다. 자연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스스로 해낼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었다.
2010년 3월 11일, 문주현(53) MDM 회장은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몇 시간 전의 감격이 새록새록 솟구쳤다. 한국자산관리공사(KAMCO)와 한국자산신탁 주식양수도계약을 체결, 개발ㆍ마케팅ㆍ컨설팅ㆍ신탁업무를 총망라한 종합부동산그룹을 향한 큰 걸음을 내디뎠다. 한국 디벨로퍼의 선구자였던 그가 부동산개발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한 순간이었다. 그는 과연 ‘부동산개발의 미다스’였다. -타깃을 명중한 감회가 클 듯하다. “첫 발을 적중했을 뿐이다. 남은 화살이 많다. 시험에 비유한다면 이제 겨우 1번을 풀었다고 할까. 안도감보다는 다음 문제를 풀기 위해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 한다.” -그렇게 큰 의미가 있나? “부동산개발회사의 부동산신탁회사 인수는 한국 최초다. 제도권 안에서 전문적ㆍ체계적 개발사업을 통해 소비자에게 신뢰받으면서 다양한 방식의 개발사업을 펼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MDM의 풍부한 개발ㆍ마케팅ㆍ컨설팅 경험과 한국자산신탁의 튼실한 신탁업이 결합, 시너지효과를 내게 됐다.” 한국자산신탁은 KAMCO가 75.24% 지분을 보유하고 있던 부동산신탁 전문회사다. 2008년 8월 발표된 정부의 공기업 선진화 방안에 따른 민영화 첫 사례로서, 공기업 선진화 방안에 따른 민영화 규모로는 역대 최대다. 그는 공동 무한책임사원(General Partner)으로 참여하고 있는 대신MSB 사모투자전문회사(PEF)를 통해 50%+1주를 인수. 실질적 운영주체자가 됐다. 인수 주식수는 총 134만 7300주, 인수 금액은 721억원이다. -앞으로 그림은? “한국자산신탁은 그동안 신탁업계에서도 충실한 재무 건전성과 안정적 고객자산관리로 신뢰가 매우 높았다. 그렇지만 단순 구도의 관리신탁 중심의 편협성으로 신탁시장 개방에 무방비 노출된 형국이다. 한국자산신탁의 강점에 MDM의 컨설팅ㆍ개발신탁을 접목, 진정으로 고객이 원하는 맞춤형 신탁사업을 제공하겠다. 개발사업 참여자 각자가 필요로 하는 금융(PF)ㆍ관리ㆍ컨설팅ㆍ마케팅 등 다양하고도 특화한 전문서비스를 제공, 보다 원활하고 안정된 개발사업이 가능하도록 하겠다.”
도피하듯 고향을 떠났다. 1976년, 광주직업훈련원 기계과에 제1기 국비장학생으로 입학했다. 머리는 어디 가지 않았다. 400명 중 1등으로 졸업했다. 그러나 학력의 벽은 높았다. 자격증은 다 같은 게 아니었다. 고졸 학력의 동기가 실습교사로 가는 반면, 소년은 보수가 낮은 공장 취업밖에 선택의 길이 없었다. 차별 타파의 열쇠는 공부였다. 검정고시에 도전했다. 6개월, 가뿐히 고졸 검정고시를 뚫었다. 신은 한 번의 시험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몇 번이고 벼리고 벼렸다. 잊을 만하면 닥치는 시련이었다. -경희대 회계학과 (19)83학번이다. 공백이 길다. “대학입시를 앞두고 징집영장이 나왔다. 군 제대 후 처음부터 다시 대학 문을 두르렸다.” -고비가 또 있었다는데…. “대학 2년 때부터 1년 반 동안 결핵으로 시달렸다. 포기하고 싶었다. 아버지께서 말렸다. ‘너를 믿는다. 너는 할 수 있다’고 끊임없이 격려해 주셨다. 중계동 개척교회에서 중고과정 어학교사로 봉사활동을 하며 마음을 다졌다. 가난하고 몸은 아팠지만 처한 환경에서 지닌 능력을 나누고 싶었다.” 그는 1990년대에도 결핵이 재발, 두 번씩이나 쓰러졌다. 고향에 내려가 쉬며 피곤한 몸과 마음을 달랬다. 그의 꺾이지 않는 도전정신은 자라온 환경과 거듭된 고비에서 비롯됐다. 극한상황을 헤쳐 나온 투지가 오늘의 물러서지 않는 열정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고향은 그에게 그리움과 한으로 같이 다가온다.
1998년, 부동산 분양시장에 한바탕 선풍이 일었다. IMF 외환위기체제의 암운이 드리운 그때, 코오롱그룹 분당 트리폴리스가 완전 분양됐다. 모두로부터 “미친 짓 아닌가”라는 시선을 받았던 그가 창출한 ‘대박신화’였다. 이해 4월, 출범의 닻을 올린 MDM이 첫걸음으로 내디딘 부동산개발사업이 트리폴리스 분양이었다. 그 후는 화려했다. 내딛는 걸음마다 바람, 바람을 일으켰다. 이듬해 서초동 슈퍼빌, 2000년 목동 현대하이페리온과 분당 현대산업개발, 2002년 분당 파빌리온 등 잇달은 개가를 올렸다. 2007년 6000억원 규모의 부산센텀시티 월드마크센텀 시행 및 분양 성공은 그 절정이었다. -그 어려운 시기에 창업은 무모하지 않았나? “나산종합건설 개발사업본부장 재직 시 ‘최연소 상무’라는 타이틀로 언론에서 각광받을 만큼 잘나갔다. 1998년 1월, 나산그룹이 쓰러졌다. 새로운 전기가 필요했다. ‘한국 부동산개발의 밑그림을 내가 그렸으니 완성도 내가 하겠다’는 오기도 치솟았다. 노하우는 그 누구보다 풍부했고, 그만큼 자신있었다. 한국 부동산개발시장에 새 그림을 그리겠다는 각오로 덤볐다.” -‘순풍에 돛 단 듯’이란 표현이 생각난다. 매년 100% 이상 성장했다. “개발사업의 기본은 소비자의 마음을 읽는 것이다. 정확히 소비자의 욕구를 읽고 시장의 흐름을 재빨리 파악, 남보다 한 발 앞서 치밀하게 대응한 전략이 주효했다. MDM의 경쟁력은 마케팅이다. 철저하게 소비자 욕구를 파악한 뒤 소비자가 찾을 수밖에 없는 상품을 만든다. 실례로 월드마크센텀은 입지와 차별화한 상품 경쟁력으로 승부했다. 37층 4개동 496세대 규모인 이 주상복합은 전세대 양면개방형 설계, 조망권을 극대화한 동 배치, 특화한 주민커뮤니티공간으로 센텀시티 내 랜드마크로 떠올랐다. MDM의 성과는 총분양금액(약 13조5000억원)과 총분양가구수(약 3만8000가구)에서도 입증된다.”
그는 유달리 별호가 많다. 대부분 부동산이 앞에 붙어 다닌다. ‘귀재’ㆍ‘박사’ㆍ‘미다스’ 등 천재성이 엿보이는 별명들이다. 그 근원은 나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7년, 그는 대졸 공채1기로 나산실업에 입사했다. 우리 나이 서른하나, 늦깎이는 처음부터 천재성을 번득였다. 독특한 아이디어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특진(7회)을 거듭하며 입사 6년 만에 별(이사)을 달았다. -1990년대 초 오피스텔에 주거 개념을 처음 도입했다. “오피스텔의 인기가 사그라들던 때 부동산 기획업무를 맡았다. ‘왜 오피스텔을 사무용으로만 쓰나, 잠을 자도 되지 않을까?’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발상의 전환, 그 효력은 대단했다. 신세대 미시족을 끌어들이겠다는 생각에서 붙인 대치동 미씨860오피스텔을 사흘 만에 분양 완료했다. 만능스포츠센터, 유아방, 놀이방 등 당시로선 파격적 발상의 시설설치가 크게 어필했다. 원스톱 라이프시스템도 또한 그의 아이디어다. 금융ㆍ소비ㆍ레저ㆍ생활을 두루 갖춘 편의성에 소비자는 환호했다. “늘 ‘왜’라고 되묻는다. 잘 되면 왜 잘 되는가, 안 되면 왜 안 되는가 나름대로 검증한다.” 그는 요즘 ‘천사’라는 별칭도 듣는다. 수재민 돕기, 불우이웃 돕기 성금 및 쌀 기부 등 다양한 사회봉사활동을 실천, 걸식노인 지원단체인 다일공동체 밥퍼로부터 천사회원증을 받았다. 나눔 그의 좌우명이다. 대학시절부터 키워 온 상생철학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공허하다”며 나눔의 길을 걷고 있다. “학비 때문에 학업을 접으려 할 때 독지가의 도움으로 대학을 졸업했다. 봉신장학회에서 2년 전액 장학금을 받았다. 그때, ‘나도 돈을 벌으면 베풀겠다’고 다짐을 거듭했다.” 문주장학재단의 설립 배경이다. 2001년, 스스로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10억원을 출연해 설립했다. 지난해엔 10억원을 추가 출연했다. 9년 동안 약735명의 학생들에게 총 4억 6000만여원의 장학금을 지급했다. 2008년 7월엔 모교 경영대 발전기금으로 2억원을 기탁했다. 모교 관산중 씨름부에 4500만원을, 관산남초등교에 매년 200만원의 도서구입비를 지원한다. -나눔의 신념이 있을 듯하다. “‘세상의 재물은 하나님으로부터 빌려 쓰는 것이요, 내 것이 아니다’라는 가르침을 따를 뿐이다. 버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하다. 장학금을 받은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말이 있다. ‘성공하면 사회에 빚을 갚아라.’” -목표는? “60세까지 200억원을 조성해 장학사업과 함께 문화ㆍ예술ㆍ연구 분야도 지원하려 한다. 전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싶다.” 그는 지난 3월 3일 제44회 납세자의 날에 모범납세자로 선정돼 기획재정부장관 표창을 수상했다. 성남 분당=글ㆍ최규섭기자kschoe@ 사진ㆍ안윤수기자 ays77@ 〈앞선생각 앞선신문 건설경제-무단전재 및 배포금지〉 |